국영방송의 잔재를 털어내라 (I)

국영방송의 잔재를 털어내라 (I)

한국 최대 공영방송 KBS 9시 뉴스에서는 2월 29일 다음과 같은 단신이 방송됐다.

“나경원 전 의원의 남편 김재호 판사로부터 2005년 네티즌을 기소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검사의 실명이 공개된 가운데, 경찰은 먼저 의혹을 처음 제기한 나꼼수 멤버 주진우 기자에 대해 실제로 기소 청탁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주진우 기자에 대해 실제로 기소 청탁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침?” 기사를 정말 자세히 읽지 않으면 주진우가 기소청탁을 한 것 같고 이에 대해 경찰이 확인하는 것 같다. 2월 29일, 이 날 이 기사의 핵심 내용은 박은정 검사가 김재호 판사로부터 기소 청탁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힌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도 정확히 짚을 수 있는 기사 내용의 핵심적 문맥이 이상한 문장으로 뒤엉켜버렸다. 이 서너줄의 단신을 TV를 통해 들은(읽지 않고) 시청자는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집권여당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좀처럼 사태 파악이 되지 않게 하는 놀라운 신공은 다음 기사에서도 발휘된다.

“대구 동구 갑 출신의 주성영 의원이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할 예정입니다. 주 의원은 KBS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최근 검찰의 소환 통보로 총선 공천 작업이 진행중인 당에 부담을 주기 싫어 불출마를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주 의원은 새누리당 대구시당위원장이자 국회 정치개혁특위 새누리당 간사로 검찰로부터 진정 사건에 대한 피진정인 신분으로 오는 28일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단신의 제목은 <주성영 “당에 부담 주기 싫어 불출마”>다. 사건의 핵심인 성매매의혹은 아예 기사에 없다. 이런 기사를 그냥 듣다보면 주성영이 큰 뜻을 품고 당을 위해 총선에 불출마한 것 같다. 시청자가 주성영 의원의 성매매의혹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기사 속 마지막 문장의 “검찰로부터 진정사건에 대한 피진정인 신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 챌 수나 있겠는가?

도대체 왜 이런 기사를 쓰는 것인가? 내가 아는 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출세를 하기 위해서다. 공영의 탈을 쓰고 사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해도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잘 먹고 잘 살아온 선배들의 삶을 흠모해서다. 정치부에서 커서 특파원 되고 국장 되고 본부장 되고 정치인 되고 사장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지난 수십년동안 독재와 권위주의에 저항했던 언론인들은 고난의 세월을 보냈지만 충성하고 협잡한 인간들은 권력의 단물을 빨지 않았던가? 게다가 대통령 후보의 언론특보로 일하다가 뻔뻔하게도 공정방송 운운하며 KBS사장까지 오른 김인규도 있지 않은가? 나도 못할게 무언가? 이런 마음….김인규로 대표되는 국영 KBS의 해악은 역사적으로 세습되고 교육돼 암세포처럼 퍼져있다.공영방송에서 사조직을 만들어 승진하고 앵커 되고 특파원 되고, 나아가 국회의원이나 사장까지 될 수 있다면…욕망으로 이글대는 머리 좋은 인간들의 눈동자에 KBS의 과거와 현재가 있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상당수의 언론인들이 이런 기사를 쓰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들지 않는 상황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기사인지, 무엇이 시대 정신을 구현할 프로그램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반복되는 일상에 빠져버린, 은근히 교육된 자기 검열에 허우적대는 무지한 자아들 덕분이다. 언론의 자유가 탄압받는 시대에 이런 기사나 쓰고 있는 것이 객관적 공영방송의 기자가 지켜야 할 덕목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무수한 군상들이 KBS에 존재하는 것은 엄존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KBS의 문제는 안팎에 있다. KBS의 공영성과 독립성을 무시로 짓밟는 외부의 권위주의 기득권 세력과 욕망으로 이글대는 내부의 정치적 인간들, 그리고 반복적 일상에 빠져 언론자유의 가치를 잃어버린 직장인같은 언론인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KBS를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한국 최대의 공영방송이 참주인인 시청자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4화에서 계속됩니다. KBS 새노조의 파업기간 동안 최경영의 서동요는 KBS 내부개혁방안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고발했던 <9시 거짓말>의 저자로서, 현재 KBS 새 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 보도부문 간사를 맡고 있다. 트위터 계정은 @kyun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