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쓰는 것이 왜 위대하고 숭고한 일인가? [여여한 독서]

내 삶을 쓰는 것이 왜 위대하고 숭고한 일인가? [여여한 독서]

ai주식/주식ai : 열 장 남짓한 원고를 쓰는 데 열흘을 끙끙거렸다. 결과물을 보니 헛수고였다. 긴 한숨. 그러고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이란 책을 펼쳤다. 저자인 낸시 슬로님 애러니는 45년간 ‘마음으로부터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쳤단다. 이 정도 경력자면 낙담한 나를 일으켜 세울 만한 몇 가지 팁을 알려주리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으나 못 쓰고 있는 내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지금까지 몇 권의 글쓰기 책을 읽었지만 실전에 도움이 된 적은 없다. 오히려 귀한 조언들을 실천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만 했을 뿐. 그래도 글쓰기가 막혔을 때 이런 책을 보면 심기일전할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카지노 : 서문에서 저자는 “자전적 에세이 쓰기야말로 최고의 치료제”라고 확언한다. 나는 공감하지만 100%는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쓰는 건 “부서진 마음”을 추스르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하나 “최고의 치료제” 같은 말로 효험을 과장하고 싶진 않다. 하염없이 걷는 것도, 땀 흘리며 쑥대밭을 정리하는 것도 ‘최고의 치료제’가 된다. 누군가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더 좋은 처방이 되기도 하고.

남의 글을 읽는 것은 남의 말을 듣는 것과 같다. 정독은 경청이다. 요즘은 읽기보다 쓰기가 유행이지만, 그래서 읽지는 않고 쓰기만 하려는 이들이 많지만, 쓰는 사람이자 읽는 사람인 나는 이런 세태가 불만스럽다. 다른 목소리를 듣기보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열심인 사람들만 모인 세상, 얼마나 시끄러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기에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도 책에 빠져들진 않았다. 은근히 재미있어서 계속 읽긴 했지만, 마치 팔짱을 끼고 강의를 듣는 청소년처럼, 저자의 말에 토를 달았고 거리를 두었다. 저자는 글쓰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팁을 69가지로 정리하면서 각 장마다 주제와 관련된 자신의 글을 함께 제시하는데, 내게는 그 글들이 전형적인 미국식 에세이(유머와 반전을 노린 보여주기식 서술)의 표본 같았다. 5년 전이라면 그런 글쓰기에 감탄했겠지만 미국식 에세이를 물리도록 읽은 지금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애러니가 이겼다. 나는 그가 쓴 자전적 에세이에 눈시울을 붉혔고, 마음을 열었으며, 끝까지 읽자마자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 그냥 넘겼던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가령 “당신의 자전적 에세이는 위대하고 숭고한 작업이다” 같은 문장들에. 처음 읽을 땐 과장이라 여겼는데 두 번째로 보니 그 문장에 담긴 속뜻을 알겠다. 저자가 첫 장에서 “당신 자신의 제자가 되어보면 어떨까?”라고 말한 이유도 비로소 알았다.

애러니는 말한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자기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이고 자신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신을 알려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가르치려는 이는 드물고 외롭고 귀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니 자전적 에세이를 쓰는 일이 ‘위대하고 숭고’할밖에.있는 그대로의 나를 써라

위대한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책은 그 어려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한 여러 방도를 일러준다. 우선, 그 일을 왜 하려 하는지 아는 것부터. 저자에겐 생후 9개월에 당뇨병 진단을 받고 스물두 살에 다발성경화증이 발병한 아들이 있었다. 저자 부부는 아들이 서른여덟 살에 세상을 뜰 때까지 16년간 그를 돌봤다. 저자는 그 세월 동안 자신에게 필요했던 책이 세상에 없어서 자전적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직시하기 위해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쓰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제3자의 입장이 될 수 있었고, 치유되기 시작했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말처럼, 자기 삶을 쓰는 것은 고통과 직면하는 일이고, 자신의 고통에 빠져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한 과오를 깨닫는 일이다. 글쓰기는 엄중한 자기 객관화를 요구한다. 섣부른 변명과 자기 연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쓰고 “비극의 한복판”에서 “흐르는 피를 종이에 옮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보답이, 정화와 치유라는 선물이 찾아온다.

상상해보라.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부족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기꺼움을. 누구의 행복도 질투하지 않는 온전한 평화를. 단지 글을 쓰는 것만으로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가! 단지 글을 쓰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삶을 직시하고,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이 느낀 진실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된다. “책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하면서 쓰되, “책으로 출간되기를 기대하지 말고” 쓰면 된다. 내 안에 부처가 있고 천국이 있고 “내가 세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되, 세상은 그걸 알아주지 않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쓰면 된다.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자, 이제 쓰자. 그렇게 쓰인 당신의 자전적 에세이는 당신 자신과 주위 사람을 흐뭇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는 아직 내 삶을 직시할 용기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자신도, 진실을 말할 단호함도 없다. 세상의 인정보다 내 영혼의 성숙을 바라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어떻게 하면 독자를 만족시킬까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길. 나는 이 책을 한 번 더 읽고 뒤따라가겠다.기자명김이경 (작가)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글쓰기#낸시 슬로님 애러니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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