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을 잘린 사람의 위로법

팔을 잘린 사람의 위로법

<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에 2005년 연재됐던 만화 모음집입니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만화가 지망생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그려냈는데요. 5년 전에 나왔지만 지금 떠드는 88만원 세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여전히 따끈따끈 합니다. 특히 집에 물이 새자 주인공과 친구들은 주인에게 항의하러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뻔뻔한 대응. 하지만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방으로 돌아와 ‘C-8’이라며 분노해보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들의 분노는 ‘왜 미안해하지 않는 거냐’는 의구심을 벗어나지 못하죠. 사회의 부조리조차 개인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습과 닮아있었습니다.

물론 신문 연재용으로 그렸기 때문인지 분량이 짧습니다. 때문에 내용의 깊이보다는 뒤통수를 휘갈기는 임팩트로 승부를 봐야할 텐데요. 네 컷 만화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부분에서 <습지생태보고서>는 아쉽습니다. 에피소드를 다 읽고 난 뒤에도 뭔가 미적지근하다고나 할까요. 그렇다고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엔 분량이 짧아, 공감이 좀처럼 안 됩니다. 때문에 만화 속 유머는 한층 더 멀게 느껴지고요. 극중 사물을 의인화하는 내용은 만화와 나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듭니다. 현실논리를 대변하는 사슴의 존재도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주인공들의 자취방을 습지로 비유해, 이곳의 생태를 관찰하겠다는 책의 컨셉도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물론 <습지생태보고서>가 다른 만화들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만, <공룡둘리의 슬픈 오마쥬>를 읽고 받았던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커서였을 뿐이죠. 만화 곳곳에 엿보이는 고민의 흔적은 언제나 군계일학입니다.)

그럼에도 <습지생태보고서>의 한 에피소드가 절 사로잡았습니다. ‘제목; 팔이 잘려 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 등록금 때문에 휴학을 고민하는 친구에게 세 명의 친구가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친구1; 야 우리 집은 아직도 두 칸짜리 전세야. 니넨 그래도 아파트라도 있잖아.’ ‘친구2; 난 어릴 때 6개월 동안 밥에다 간장만 비벼먹은 적도 있다. 야.’ ‘친구3;너 태풍 부는 날 지붕 날아 갈까봐 잡고 있어봤냐?’ 대화는 끝납니다. 이어지는 작가의 독백. ‘이런 경우 고민의 당사자는 죄인이 되고 가장 비참한 경험 소유자가 유일한 발언권자가 된다.’ 기가 막힌 현실 통찰력입니다.

한 선배는 팔이 잘린 사람이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인간의 경쟁심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매사에 지나치게 경쟁적인 사람은 심지어 고통마저도 경쟁으로 받아들이고, 남의 고통보다 자신의 고통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는 말이었죠. 마치 넘어져서 팔꿈치가 까진 친구의 상처를 바라보며, ‘그건 아무 것도 아냐. 난 지난번에 롤러스케이트 타다가 아스팔트 위에서 넘어졌는데, 무릎 양쪽이 다 까졌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배는 경쟁이 몸에 배어버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경쟁할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도 경쟁하려드니까요.

일면 이해가 되면서도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남의 상처를 이해하는 법을 몰라서, 위로하는 방법을 더더욱 몰라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처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신의 방식대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야 그 상처 가지고 너무 괴로워 하지마. 난 이런 상처도 겪었어. 이것에 비하면 네 고통은 얼마나 작은 거니. 그러니 괴로워하지 말라고.’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죠. 동생 둘 딸린 소녀 가장이 할머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밤마다 고생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고민은 투정에 불과했음을 깨달으라고 이야기하는 식인 셈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우리가 겪는 상처는 투정이 아니라 진짜 아픔인걸요. 네 눈에는 투정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가슴은 지금 너무나 아프다는 걸 말이죠. 제 상처도 남의 상처 못지않게 깊고 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동정하지 못합니다. 남의 마음을 진솔하게 느끼지도 못하고요. 이성복 시인은 느끼지 못함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모든 느낌은 그(바슬라브 니진스키)에게 날카로운 칼끝으로 다가오며, 그 칼끝보다 더 지독한 것은 바로 타인의 느낌 없음이다….. …. 그가 그의 삶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세상의 모든 죄는 느낌 없음으로부터 저질러지기 때문이었다. (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힘들다고 이야기한 아내는 단지 따뜻한 위로가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곧바로 튀어나오는 고난의 경쟁담. ‘근데 니네 회산 편한 편이야. 사기업 다니는 애들은 훨씬 더 악랄한 상사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 그런 애들에 비하면 네 고통은 고통도 아니야.’ 마음으로는 전혀 남의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선, 입으로 다 안다는 듯 이야기합니다. ‘나도 공기업 다녀봤잖아. 그런 빡빡함에 신물 나는 경우가 많지. 그럴 때 나는 그냥 눈귀 닫고 무시했어. 너도 그래봐.’ 느끼지 못하는 말은 위로가 아닙니다. 염장입니다.

물론 여자 친구를 위한 스포츠카를 사기 위해 밥을 굶고 괴로워하는 철없는 고민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민과 상처가 철없는 고민인지 아닌지 평가하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 상대의 아픔을 느껴보고자 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합니다. 상처와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꼽아봅니다. 1.친구의 고민이 대화의 주제여야 한다. 갑자기 자신의 고생담으로 대화의 화제를 돌리지 말자. 전혀 위로되지 않으니까. 2.한 번 듣고 고민의 핵심을 다 아는 듯 이야기하지 말자. 고민 당사자는 당신처럼 단순한 뇌를 갖고 있지 않으니까. 3.상대의 고민을 평가하지 말자. 그냥 공감해보자. 때론 백 마디의 위로보다 함께 울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으니까.

팔을 잘린 사람도 손가락 잘린 사람의 상처를 함께 아파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